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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07/01 대한민국 국군의 계급
- 2007/07/01 <전쟁사>살라미스(Salamis) 해전 (장군 : 레오니다스)
- 2007/07/01 <전쟁사>한산도대첩(장군 : 이순신)
- 2007/07/01 <전쟁사> 탁록대첩(장군: 치우천왕)
- 2007/07/01 <전쟁사>트리팔가 해전(장군 : 넬슨)
- 2007/07/01 <전쟁사> <32>살수대첩 승리로 이끈 을지문덕 장군
- 2007/07/01 <전쟁사>진포대첩(장군 : 최무선)
장관급(장성급) 원수 대장 중장 소장 준장
영관급 대령 중령 소령
위관급 대위 중위 소위
준사관급 준위
하사관급 원사 상사 중사 하사
병급 병장 상병 일병 이등병
* '원수'라는 계급이 설치되어 있기는 하나 아직까지 국군에서 원수가 탄생한 적은 없습니다. 전쟁이 발발한다거나 하면 진급시킬 가능성은 있지만...
-군인사법 제27조(원수임명) : 1.원수는 국가에 대한 공적이 현저한 대장중에서 임명한다. 2. 원수의 임명은 국방부장관의 추천에 의하여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행한다.<개정 63.12.16>
* 다음은 각 계급별 최저 및 최고 제한 연령입니다. 예외적으로 하사관이나 준사관에서 소위로 진급(임용)하는 경우에는 소위의 최고 연령을 35세까지로 하고 있습니다. 국가비상시(전쟁/사변)에는 예외가 적용될 수 있습니다.
초임 계급 : 소령 대위 중위 소위 준위 하사관(하사/중사)
최고 연령 : 36세 32세 29세 27세 50세 27세
최저 연령 : - - - 20세 20세 18세
* 진급에 필요한 최저근속기간과 전계급 최저복무기간은 다음과 같습니다. 군의장교나 치의장교, 법무장교 등은 최저근속기간을 적용받지 않습니다.
진급 계급 최저 근속 최저 복무 ㅣ 진급 계급 최저 근속 최저 복무
소장 28년 준장으로 2년 ㅣ 대위 3년 중위로 2년
준장 26년 대령으로 3년 ㅣ 중위 1년 소위로 1년
대령 22년 중령으로 4년 ㅣ 원사 상사로 7년
중령 17년 소령으로 5년 ㅣ 상사 중사로 5년
소령 11년 대위로 6년 ㅣ 중사 하사로 2년
해설 : 소령이 되기 위해서는 대위로 진급한 지 6년이 경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최저 근속기간이라는 것은 (소령의 경우) 대위 만6년차 이상라고 모두 진급 대상자가 되는 것은 아님을 의미합니다. 최소 11년의 근속 기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 물론, 진급 대상자에 올랐다고 모두 진급되는 것은 아니죠.
* 병급의 경우 진급에 필요한 최저복부기간은 다음과 같습니다. 단, 국가비상시(전쟁/사변)에는 병력충원상 필요하다고 인정될 때 참모총장이 국방부장관의 승인을 얻어 이를 단축할 수 있습니다. 중학교 이상 학교 졸업자나 이와 동등 이상의 학력을 소유한 병 가운데 능력이 탁월하거나 근무성적이 우수한 자는 예외적으로 오른쪽에 표기한 기간만 거치면 진급될 수 있습니다(즉, 2개월씩 단축).
병이나 간부(장교/하사관) 모두 전투에 있어서 현저한 공을 세우거나 간첩을 체포하거나 하면 1계급 또는 2계급 정도의 특별 진급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진급될 계급 전계급최저복무기간(일반) 전계급최저복무기간(예외규정) 병장 상등병(상병)으로 8개월 상등병으로 6개월 상등병 일등병(일병)으로 6개월 일등병으로 4개월 일등병 이등병(이병)으로 5개월 이등병으로 3개월 대부분의 육군 부대에서는 6-6-8을 기본 진급 월 수로 하고 있습니다. 이등병은 가간은 훈련병 기간(6주)를 포함해서 6개월로 하는 것이죠. 병급의 경우 매진급은 매월 2일을 기준으로 행해집니다. 예를 들면, 6월1일자 입대자를 5월 군번과 같이 진급시키는 것입니다(월 단위로 선후임을 구분하는 부대의 경우 대부분 먼저 진급했다고 같은 6월 군번보다 우대하지는 않습니다만... 즉, 동기 취급~).
* 각 계급별로 '현역'에서 근무할 수 있는 정년은 다음과 같습니다. 국가비상시 (전쟁/사변)에는 예외가 적용될 수 있습니다.
-연령 정년 : 원수(종신), 대장(63세), 중장(61세), 소장(59세), 준장(58세), 대령(56세), 중령(53세), 소령(45세), 대위이하(43세) 준위(55세), 원사(55세), 상사(53세), 중사(45세), 하사(40세)
-근속 정년 : 대령(35년), 중령(32년), 소령(24년),
대위이하(15년), 준위(32년)
-계급 정년 : 중장(4년), 소장(6년), 준장(6년)
-해설 : 대령으로는 56살(만으로)이 넘으면 현역으로 더 이상 복무할 수 없고 예편하거나 퇴역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대령일 경우에 56살이 안넘었더라도 군에 들오온 지 35년이 지나면 전역해야 하고요. 계급정년은 준장으로 6년 넘게 했으면 예편이나 퇴역하라는 뜻입니다. 즉, 진급을 못하면 일정한 나이나 근속 연수가 되었을 때 군(현역)을 떠나야 하는 것이죠. 장교일
경우에는 중령(최소한 소령) 이상, 하사관은 상사(아주 예외가 아니면 다 진급하죠.) 이상이면 대략 정년 선까지 근무가 가능하며, 연금과 퇴직금을...
-연금은 복무 20년 이상자에게 지급됩니다(불명예 제대 같은 경우 제외).
-예편은 예비역 편입(예비군지휘관:이것도 연령/계급에 제한이 있죠.). 퇴역은 군을 떠나는 것입니다. 즉, 동원령이 내려지거나 해도 소집되지 않는(맞나)...
* 아래는 각 계급별 봉급(본봉) 기준표입니다. 비교를 위해 1호봉과 3호봉, 6호봉, 10호봉을 나열했습니다. 각종 수당(체력단련/효도/정보/교통/주택/장기복무/주부식비/시간외근무)이 본봉을 훨씬 초과하며, 각종 세제상과 물품 구입 상의 혜택이 있기 때문에 단순히 비교하시는 차원에서 보시기 바랍니다. 대략 본봉의 2.2배에서 (최대) 3배 정도를 하면 월평균 급여가 나오는 것 같습니다
(말 그대로 대략). 분기별로 '보너스 달'인가도 있죠(3/6/9/12월). 오른쪽에 각 계급에 상당하는 일반 공무원 적정(?) 호봉별 봉급을 참조하였습니다.
<군인봉급표:1996.12.31 개정> 기준
계급 1호봉 3호봉 6호봉 10호봉 일반직 공무원
소장: 1,444,200 1,518,000 1,628,700 1,776,300 - 1급 15호봉(1,721,200)
준장: 1,360,500 1,432,500 1,540,500 1,684,500 - 1급 12호봉(1,580,200)
대령: 1,094,700 1,171,500 1,286,700 1,440,300 - 2급 10호봉(1,332,900)
중령: 969,700 1,046,500 1,161,700 1,315,300 - 3급 10호봉(1,200,300)
소령: 790,600 865,800 978,600 1,129,000 - 4급 10호봉(1,069,900)
대위: 623,400 694,000 799,900 941,100 - 5급 8호봉( 882,100)
중위: 478,000 537,000 625,500 - 6급 3호봉( 590,700)
소위: 432,600 488,600 - 6급 1호봉( 534,000)
준위: 575,300 664,100 723,300 841,700 - 7급 10호봉( 725,000)
원사: 831,600 914,700 970100 1,080,900 - 8급 25호봉( 910,800)
상사: 562,700 642,500 695700 802,100 - 8급 15호봉( 755,700)
중사: 445,100 520,100 570100 670,100 - 8급 7호봉( 574,600)
하사: 371,700 416,700 446700 506,700 - 9급 2호봉( 390,900)
병장: 13,300
상병: 11,800
일병: 10,600
이병: 9,600
- 준위는 대부분 하사관에서 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원사의 호봉과 같은 복무 기간에 맞는 호병을 추가로 설명합니다. 원사1호봉=준위14호봉(960,100), 원사3호봉=준위16호봉(1,019,300), 원사6호봉=준위19호봉(1,108,100), 원사10호봉=준위23호봉(1,226,500).
- 일반적으로 전역 무렵시 하사관(원사15호봉)은 1,219,400원, 준위(27호봉)는 1,344,900원, 중령(15호봉)은 1,507,300원 가량이 됩니다. 각종 추가되는 수당과 연금액, 퇴직금(!), 그리고 자부심이나 자존심(계급) 등에서 크게 차이는 있지만, 생활하기에는 무리가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대장(2,251,000) 중장(2,061,000) : 단일 호봉제
- 사관후보생(129,500)
사관생도:1학년(103,700) 2학년(116,800) 3학년(129,500) 4학년(163,100)
- 하사관후보생:1학년(22,500) 2학년(28,700) 3학년(36,600)
본인의 지원에 의하지 않고 임용된 하사(46,100)
* 계급별 호봉 기준은 다음과 같이 산정합니다. 1호봉 이후는 복무 기간 1년을 1호봉으로 계산합니다. 즉, 복무 기간 1년 증가시 1호봉 가산.
원수, 대장, 중장은 단일 호봉 : 호봉 단계가 1단계 단일로 되어 있습니다.
소장 1호봉은 복무 기간 21년 미만자(최고 13호봉:복무 기간 32년 이상자).
준장 1호봉은 복무 기간 19년 미만자(최고 13호봉:복무 기간 30년 이상자).
대령 1호봉은 복무 기간 13년 미만자(최고 15호봉:복무 기간 26년 이상자).
중령 1호봉은 복무 기간 10년 미만자(최고 15호봉:복무 기간 23년 이상자).
소령 1호봉은 복무 기간 7년 미만자(최고 14호봉:복무 기간 19년 이상자).
대위 1호봉은 복무 기간 4년 미만자(최고 12호봉:복무 기간 14년 이상자).
중위 1호봉은 복무 기간 2년 미만자(최고 7호봉:복무 기간 7년 이상자).
소위 1호봉은 소위 임관시 (최고 3호봉:복무 기간 2년 이상자).
준위 1호봉은 복무 기간 1년 미만자(최고 27호봉:복무 기간 26년 이상자).
원사 1호봉은 복무 기간 14년 미만자(최고 15호봉:복무 기간 27년 이상자).
상사 1호봉은 복무 기간 6년 미만자(최고 19호봉:복무 기간 23년 이상자).
중사 1호봉은 복무 기간 3년 미만자(최고 22호봉:복무 기간 23년 이상자).
하사 1호봉은 복무 기간 1년 미만자(최고 10호봉:복무 기간 9년 이상자).
* 다음은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각 계급별 직책(보직?)입니다. 상식선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죠.
대장:합참의장, 육참총장, 각군(1,2,3군) 사령관
중장:군단장, 별도 사령관(예, 교육사령관, 특전사령관, 수방사령...)
소장:사단장, 사단급 부대장(예, 육군훈련소장을 비롯한 학교부대장...)
준장:여단장, 동원사단 사단장, 군급 사령부 참모...
대령:연대장, 사단 예하 여단장, 사단급 참모장, 부사단장, 주요 부대장.
중령:대대장, 사단급 참모
소령:연대급 참모, 대대 작전장교, 사단/군단 등 각급 참모부, 대장(隊長)
대위:중대장(이상 지휘관), 대대급 참모(또는 참모부 소속 장교)
중위:소대장(이하 지휘자), 연대/대대급 참모(또는 참모부 소속 장교)
소위:소대장...
준위:각부대 전문 기술/행정 담당(수송/탄약/육군항공/통신...)
원사:각부대 주임원사, (사단급 이하) 각급 참모부 담
당관
상사:일부 부대 주임상사, 참모부 담당관, 부소대장
중사:참모부 담당관, 부소대장
하사:부소대장(원래, 분대장은 하사가 하게 되어있습니다. 전쟁이 나면...)
병장:내무반장, 분대장(물론, 모든 병장이 분대장은 아니죠.)
상병/일병/이병:분대원
* 소위 이상을 사관이라고는 하지만, 준사관을 별도로 구분하지 않을 경우에는 준위도 사관으로 분류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미군과 같은 경우에는 준위에도 여러 등급이 있지만, 국군은 단일 계급입니다(맡은 직무나 월급 차이만). 원사에서 하사 사이는 하사관(부사관으로 개칭 예정)이지만 계급장 위치나, 직위 명칭(선임하사->담당관/부소대장) 변경을 통한 사기 진작책이 계속 취해지고 있습니다. 병은 말 그대로 병이죠. 쫄병...
1. 살라미스 해전의 배경
BC 492년부터 479년까지 4차에 걸쳐 페르시아 전쟁이 단속적으로 지속되었다. 페르시아의 2차 침공을 마라톤 전투에서 격퇴한 아테네는 숨을 돌릴 수 있었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는 다시 대규모 원정을 준비하였으나 전비 조달을 위해 이집트에 중과세를 하는 바람에 기원전 486년 반란이 일어났다. 이를 진압하던 도중에 다리우스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크세르크세스(Xerxes)가 왕위를 이었다. 크세르크세스는 이집트의 반란을 진압하고 그리스 원정 준비를 시작하여 기원전 480년 제3차 침공을 감행하였다. 헤로도투스의 추산에 따르면 당시 페르시아군은 병력 264명이었지만, 실제는 약 35만명과 함선 1207척으로 구성되었다.
당시 아테네에서는 밀티아데스(Miltiades)가 실각하고, 테미스토텔레스(Themistocles, B.C. 527?-460?)와 아리스토티데스(Aristotides)가 집정관으로 통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리스토티데스는 지상전 위주의 항전을 주장하였으나, 기원전 482년에 추방되어 해전 위주의 항전을 주장하던 테미스토클레스가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는 480년 봄에 200여척의 함선을 건조하였고, 약 4만명의 수병을 양성하였다.
2. 제3차 페르시아전쟁의 전개
기원전 480년 봄 페르시아군이 헬레스폰트해협을 건너 침공해 들어왔다.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Leonidas)가 지휘하는 7000-8000명의 중갑보병과 경장비병으로 구성된 육군은 테르모필레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하였고, 아테네의 해군은 스파르타의 유리비아데스(Euribiades)를 함대 사령관으로 하는 해군은 총 330여척(이 중 아테네 함대가 180척, 스파르타 함대가 10척)으로 구성되어 바다에서 페르시아 함대를 맞았다.
크세르크세스는 폭풍으로 페르시아 함대의 도착이 늦어진 데다가 대병력을 이끌고 왔기 때문에 그리스군이 항복할 것으로 기대하여 4일 동안 군사작전을 벌이지 않고 대기하였다. 그러다가 5일 째 되는 날 공격을 감행하여 레오니다스를 비롯한 스파르타군을 전멸시켰다. 테르모필레전투에서 페르시아군도 2만명이 사망하였다.
한편 페르시아 함대는 마그네시아 반도의 동해안을 돌아 남하하는 도중에 폭풍우를 만나 함선 400척을 상실한 뒤 이틀 뒤에 아프에테에 도착하였다. 그리스측의 함대사령관인 유리비아데스는 페르시아 함대를 기습 공격하였지만,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3일째인 8월 30일 페르시아 함대와 그리스 함대간에 아르테미지움(Artemisium) 해전이 벌어졌지만, 서로 우열을 가리지 못했다. 그러나 전투 도중 테르모필레 패전 소식이 그리스 함대에 전해지자, 그리스 함대는 유보에아 해협 중 가장 폭이 좁은 에우포리스가 페르시아의 수중으로 넘어가 퇴로가 차단될 것을 우려하여 살라미스로 퇴각하였다.
3. 살라미스 해전
그리스 해군의 철수는 아테네군의 요청에 따라 이루어졌다. 헤로도투스는 “부녀자를 아티카에서 피신시키고 그 뒤에 취할 조치에 대한 여유를 갖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테미스토클레스의 전략에 따라 코린트와 살라미스에서 제2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한 것이었다. 8월 초에 아르테미지움 해로 출전하기 전에 아테네 시민에게 모두 철수 명령을 내렸고, 모든 함대를 살라미스로 집결하도록 명령하였다. 페르시아군은 손쉽게 아테네를 점령하였고, 페르시아 함대로 9월 4일 아테네의 외항에 도착하였다. 페르시아 함대는 아르테미지움 해전에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피해를 복구하느라 약 3주간 전투를 전개하지 않았다.
이 동안에 그리스 함대에서도 응전 방법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만약 해전에서 패배했을 경우 살라미스 섬으로 피신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살라미스 섬에서 철수하여 코린트 지방으로 후퇴할 것인지의 여부가 가장 큰 논란거리였는데, 전체적으로는 이 방법 밖에 없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러나 테미스토클레스는 ‘살라미스에서 철수한다면 적의 진격을 쉽게 내줄 뿐만 아니라 아테네 시민과 영토를 포기하게 되며, 열세한 병력으로 좁은 해역에서 우세한 적의 함대에 대응할 수 있는 이점을 포기하는 것’이라면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다. 따라서 이 문제를 두고 4회 걸쳐 회의가 계속되었는데, 4차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테미스토클레스는 첩자를 페르시아 진영으로 보내어 거짓 정보를 흘렸다. 첩자가 흘린 정보에 대해 헤로도투스는 ‘해전이 발생하면 그리스 내부에 친 페르시아파와 반 페르시아파간에 내분이 발생할 것’이었다고 적고 있고, 3대 비극시인 중 한 사람인 아이스킬로스(Aischylos)는 ‘페르시아 함대가 공격하면 그리스 함대는 살라미스 섬에서 철수할 것’이라고 적었다. 어쨌든 이 정보는 페르시아군을 살라미스 해협으로 유인하려는 목적에 따라 흘린 것이었다.
페르시아 함대는 이 첩자의 말을 믿고 야간에 기동을 시작하여 새벽녘에 살라미스 협수로로 진입하였다. 이 시간에 그리스 군은 마지막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페르시아 함대가 협수로로 진입하고 있다고 급보가 날아 왔다. 회의는 즉각 중단되었고, 살라미스에서 일전을 불사할 수밖에 없었다. 기원전 480년 9월 28일이었다.
페르시아 함대는 선두에 페니키아와 키프로스 함대를, 중앙에는 이집트와 그리스 점령지 함대를, 그리고 왼쪽에는 이오니아와 갈리아의 함대를 배치하였는데, 모두 750척이었다. 이에 대응한 그리스 함대는 380척으로 3열로 늘어 세우되 왼쪽에 아테네와 코린트 함대를 배치하였다. 페르시아 함대의 전술은 대함대의 이점을 살리기 위해 그리스 함대를 유인하여 넓은 해역에서 싸우는 것이었다. 페르시아측에 가담한 페니키아 함대는 살라미스 협수로의 입구인 Saronic 만에 배치되었다. 이때 그리스 함선 몇 척이 페르시아 함대 정면에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페르시아 함대가 그리스 함선을 추격하기 시작하였는데, 너무 깊숙히 추격하고 말았다. 그러나 대기하고 있던 아테네 함대와 Aegina 함대가 페르시아 함대의 진로를 가로막았다.
북쪽에서는 페니키아의 이오니아 함대와 그리스의 펠로폰네소스 함대가 충돌하였다. 이렇게 되자 길이 7km, 너비 2km 밖에 안되는 살라미스 협수로에 양측의 함대 700-800 척이 뒤엉키게 되었다. 결국 혼란에 빠진 페르시아 함대는 기동이 어렵게 되어 200척이 침몰되고, 4만명이 사망하였다. 이에 반해 그리스 함대는 46척의 함선을 상실하였다. 페르시아의 잔여 함대는 아테네의 팔레움 항으로 돌아간 뒤 다음 날 아침 사르데스 항으로 출발하였다.
해전 다음날 그리스 군은 페르시아 함대가 헬레스폰트 해협 쪽으로 퇴각하고 있으며, 페르시아 육군도 후퇴 중이라는 보고를 접했다. 그리스 군에서는 이들을 추격할 것인가에 대한 회의가 개최되었으나, 결국 페르시아군 추격전을 중지하고 에게해의 여러 섬을 진입하기로 결정하였다. 이후 그리스 군은 그리스 반도와 에게해, 소아시아의 여러 지역을 진입하여 델로스 동맹에 가입시켜 이후 아테네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닦았다.
한편 살라미스 해전 직후 마르도니우스가 지휘하는 페르시아 육군이 기원전 479년 6월 보에오티아로 진격하자 아테네는 시민을 살라미스로 철수시켰다. 이에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지원군을 요청하여 페르시아 육군에 맞서서 플라타에아전투에서 마르도니우스가 전사하자 페르시아군은 퇴각하였다.
4. 살라미스 해전의 교훈
1) 살라미스 협수로는 협소하기 때문에 대규모 함대의 기동성을 제한한다. 이 점에서 그리스 측이 지리적인 이점을 잘 활용했다고 할 수 있다.
2) 첩보전을 효과적으로 이용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페르시아에 첩자로 시킨노스라는 자를 파견했는데, 이 자는 테미스토클레스의 아들을 가르쳤던 자였다. 이 첩자의 밀서를 보고 크세르크세스는 공격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3) 반페르시아노선을 표방하여 민중의 지지를 얻어 집정관이 된 테미스토클레스는 기원전 482년 육군주의를 표방하던 아리스테데스를 추방한 뒤 시의적절하게 함대를 건조하였다.
4) 기동성이 떨어지는 좁은 해역에서 효과적인 충각전술을 적절히 활용하였다.
5) 테미스토클레스라는 유능한 지휘관을 선출하고 따를 줄 아는 아테네 시민의 현명함을 들 수 있다. 마라톤 전투 이후 종전 분위기가 팽배하던 당시에 테미스토클레스는 대규모 전투가 시작될 것으로 예견하고 함대를 건조하였다. 아테네 시민들도 정치 지도자들간에 이견이 발생했고, 당시의 육군 중심이던 분위기와는 달리 해군을 중시하던 테미스토클레스를 지도자로 선출할 수 있는 현명한 정치감각을 갖고 있었다. 출전 : 김주식, <서구해전사>(연경출판사, 1997)
* 이 자료는 우리 연구소의 자문위원이신 김주식 교수님의 허락을 받아 게재하는 것입니다. 이 자료를 개인 용도 이외에 타인 또는 인터넷 상에서 전파, 유통, 전재하는 것은 저작권법을 위반하는 것입니다.
1592년(선조 25) 7월 7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크게 무찌른 전투.
1592년 6월 7일 이순신이 이끄는 삼도수사(三道水使)의 연합함대는 거제도 앞바다에서 일본 수군 대선 5척, 소선 2척이 율포에서 나와 부산진 쪽으로 향하는 것을 발견, 율포만으로 쳐들어가 대선 2척, 소선 1척을 불사르고, 나머지는 모두 붙잡았다.
1592년(선조 25) 5월 29일부터 제2차로 출동한 이순신의 수군은 6월 10일까지 사천 선창(泗川船艙)·당포(唐浦)·당항포(唐項浦)·율포해전(栗浦海戰) 등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나, 육지에서는 계속 패전의 소식만이 들려왔다. 그렇게 되자 적은 해상에서도 다시 머리를 쳐들기 시작하여 가덕도(加德島)와 거제도(巨濟島) 부근에서 적선이 10여 척에서 30여 척까지 떼를 지어 출몰하면서 육군과 호응하고 있었다.
이런 보고를 접한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은 우수사(右水使) 이억기(李億祺)와 연락하여 재차 출동을 결정하였다. 이때 일본은 해상에서의 패전을 만회하기 위하여 병력을 증강하였다.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의 제1진은 70여 척을 거느리고 웅천(熊川) 방면에서 출동하였고,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의 제2진은 40여 척을, 제3진의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도 많은 병선을 이끌고 합세하였다.
이에 이순신은 7월 6일 이억기와 더불어 90척을 거느리고 좌수영을 출발, 노량(露梁)에 이르러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원균(元均)의 함선 7척과 합세하였다. 7일 저녁 조선 함대가 고성(固城) 땅 당포에 이르렀을 때 적함 대·중·소 70여 척이 견내량(見乃梁)에 들어갔다는 정보에 접하고 이튿날 전략상 유리한 한산도 앞바다로 적을 유인할 작전을 세웠다.
한산도는 거제도와 고성 사이에 있어 사방으로 헤엄쳐나갈 길도 없고, 적이 궁지에 몰려 상륙한다 해도 굶어죽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이리하여 먼저 판옥선(板屋船) 5, 6척으로 하여금 적의 선봉을 쫓아가서 급습, 이에 적선이 일시에 쫓아나오자 아군 함선은 거짓 후퇴를 하며 적을 유인하였다.
아군은 예정대로 한산도 앞바다에 이르자 미리 약속한 신호에 따라 모든 배가 일시에 북을 울리며 뱃길을 돌리고, 호각을 불면서 학익진(鶴翼陣)을 펴고 일제히 왜군을 향하여 진격하였다. 모든 지자총통(地字銃筒)·현자총통(玄字銃筒)·승자총통(勝字銃筒)을 한꺼번에 쏘아 적선을 격파하고 불사른 것만도 66척이나 되었다.
적의 목을 잘라 온 것이 86급(級), 기타 물에 빠지거나 찔려죽은 수가 수백 명에 이르렀으며, 한산도로 도망친 400여 명은 군량이 없이 13일간을 굶주리다가 겨우 탈출하였다. 이 싸움은 임진왜란 때의 3대첩(大捷)의 하나로, 그 결과 일본 수군은 전멸하였고, 이순신은 그 공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억기와 원균은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서(陞敍)되었다.
한산도대첩 진형
한산도대첩 해전도
불멸의 이순신 OST = 한산도대첩
네이버 지식검색 발췌
그러면 B.C 2707년, 배달국에 제14대 한웅 자오지(慈烏支)천황이 즉위하면서 국과 중국간에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이제 북애(北崖)의 규원사화(揆園史話) 기록을 중심으로 하여 좀더 세밀히 들여다보기로 하자.
탁록대첩(鹿大捷)
1. 전쟁의 원인
밀기(密記)는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기를:
때에 중국대륙은 셋으로 나뉘어 서로 대치하고 있었는데 탁 의 북쪽에 대효(大曉)가, 동쪽에는 창힐 이, 그리고 서쪽에는 황제헌원(黃帝軒轅)이 있었다.
이들은 그 세력이 서로 비슷하여 우열을 가리기가 힘들었다. 그러자 황제헌원은 먼저 대효와 동맹을 맺고 창힐을 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룰 수가 없었고 이번에는 창힐과 동맹을 맺고자하였으나 이들 두 무리들이 모두 치우천황의 제후국들이어서 이마저 성공을 이룰 수가 없었다.
기주(冀州-Kish)에서 왕노릇을 하던 염제신농(炎帝神農)은 한동안 농경기술의 개발에 힘쓰면서, 또 여러가지 의약품을 만들어 백성들을 어려움으로부터 구하니 자연스럽게 제 백성들의 신망을 한 몸에 얻게 되었다. 때마침 좋은 날씨가 지속되며 옥토가 천리를 뻗게 되어 강력한 힘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유망(楡罔)대에 이르러 정사가 과격해지더니 제후들이 서로 다투고 민심마저 흩어지며 세상이 어렵게 변해버렸다. 그러자 유망을 도와 섭정을 하던 헌원(軒轅)이 반란을 일으켜 판천(板泉:上谷) 벌판에서 유망을 시해(弑害)하였다.
이에 천하의 지존이신 치우천황은 헌원을 응징하여 유망의 원수를 갚기로 결심하였다.
2. 전쟁의 진행과정
치우천황(蚩尤天皇)은 배달국군(軍)의 총동원을 명령하고, 먼저 형제와 친척 중에서 81명의 장수들을 선발하여 각각의 군단을 지휘하도록 하고, 그 자신이 창안해낸 새로운 전투방법을 익히도록 훈련을 시켰다.
한편, 군사들을 갈로산(葛盧山)①으로 보내어 철(鐵)②을 캐어 칼과 창, 투구, 방패 등을 비롯하여 각종 최신 병기들을 제작하게 하였다. 드디어 군장비가 충분히 정비되자 대병을 지휘하여 구혼(九渾)에 올라 앞을 가로막는 적병들을 파죽지세로 무찌르며 연전연승하니 그 형세가 마치 폭풍우같이 맹렬하여 천하가 놀라며 벌벌 떨었다.
그로부터 반역에 가담했던 아홉 제후(諸侯)를 굴복시켜 그 땅을 모두 회수하고, 곧이어 옹고산(雍孤山)으로 나아가 수금(水金)을 캐어 예과(芮戈)와 옹호(雍狐)의 창 등을 제작하여 군 장비를 보강 정비하고 다시 말에 올라 불과 일년 동안에 총 열 두 제후국(諸侯國)을 정복하니 들에는 시체(屍體)들이 가득차므로 반역의 무리들이 혼비백산하여 숨거나 도망치기에 바빴다.
이제 치우천황군은 양수(洋水)를 건너 공상(空裳)으로 진격하였다. 공상은 지금의 진류(陣留)로서 유망이 도읍으로 삼았던 곳이다. 공상에서는 소호(少顥)가 군사를 이끌고 대항하여 왔는데 치우천황이 안개③를 크게 일으키고 옹호창(雍狐槍)을 휘둘러 소호를 공격하니 소호는 허겁지겁 탁록(?鹿)을 바라보고 달아났다. 이리하여 공상을 빼앗은 치우천황은 그곳을 그의 도읍지로 삼고 소호의 패잔병을 소탕하기 위하여 추격군을 편성하였다.
3. 탁록대첩(鹿大捷)
궁지에 몰린 소호는 급히 헌원에게 구원을 요청했는데, 이것이야말로 오랜 세월동안 중화족의 맹주자리를 노려왔던 헌원에게 더할 수 없이 좋은 명분과 기회를 제공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 중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유사 이래로 기마족인 (東夷)족으로부터 받아오던 식민통치로부터 벗어나 그들만의 독립된 정부를 갖고 싶은 염원이 있었던 것이다. 헌원은 바로 이점을 이용하여 자신의 야심을 성취시키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때마침 중국의 동부지역은 치우천황군의 정복활동에 모두가 공포에 떨고 있는 상황이므로 이번에야말로 모든 중화족이 합심하여 치우천황군의 침입을 방어해보자는 공감대를 일으켜 보기로 하고 각 지역으로 파발을 띄웠다.
헌원의 제안에 모든 중국측 제후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을 총동원하여 보내왔다. 이제, 헌원은 그 자신의 병력과 소호의 패잔병들 그리고 각지에서 보내온 지원병들을 모두 합쳐 대연합군을 편성하고 그 스스로 총사령관에 올랐다.
이렇게 중국최대의 역량을 총동원하여 어마어마한 규모의 연합군을 편성해 놓고 보니 아무리 치우천황이 신장(神將)이라 하여도 한번쯤 자웅을 겨루어 볼만하다는 자신이 넘치게 되었다.
한편 치우천황 역시 중국인들이 황제를 중심으로 하여 모든 전력을 총결집시키고 결사적인 일전을 불사하고 있음을 간파하고, 이번 전투가 단순한 싸움의 틀을 벗어나 족과 중화족의 운명을 결정지을 대규모 민족전쟁의 성격임을 깨달았다.
전쟁의 승패란 그 병사들의 수효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천재적인 전략을 구사하는 치우천황은 승리에 유리한 전장터를 탁록일대로 정하고 치밀한 작전으로 적병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과연 황제헌원은 그가 이끄는 연합군의 수효가 천황군에 비하여 수배에 달한다는 정보만 믿고 기고만장하여 소수의 천황군을 뒤쫓아 탁록의 계곡으로 뛰어 들어왔다.
기회를 보고 있던 천황이 갑자기 천둥소리처럼 북소리를 울리면서 크게 안개를 일으키자 곧장 안개에 에워싸인 적병들은 이내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이에 적병들은 크게 놀라고 겁에 질려 달아나며 목숨을 보존할 생각밖에 없게 되었다.
이때 또다시 북소리들이 울리면서 천병들이 사방으로부터 어지러이 달려드니 황제의 대군이 순식간에 오합지졸로 변하여 흩어지고 말았다. 단 한나절의 싸움에서 탁록의 귀신으로 변한 황제헌원 병사들의 시체가 여기저기 흩어져 산처럼 쌓였고 그들이 흘린 피는 강을 이루었다.
중국의 관자(管子-管仲)는 이 싸움을 기록하기를 ‘천하의 임검이 칼을 들고 노하자 쓰러진 시체가 들에 가득하다.’라고 하였다.
이 전쟁의 결과로 회남(淮南), 산동(山東), 북경(北京), 낙양(洛陽) 등이 모두 천황의 영토가 되었다.
1805년 3월 30일, 스페인 해군제독 Pierre de Villeneuve는 20척의 함대를 거느린 해군제독 Gravina와 합류하기 위해 영국 해군제독 Horatio Nelson의 봉쇄를 뚫고 Martinique로 향했다.
같은해 7월 22일, Franco-Spanish함대는 Finisterre곷에서 18척의 영국함대와 교전을 벌였지만 2척의 전함을 잃고 Cadiz로 퇴각했다. 이는 곧 나폴레옹 대두가 영국을 포기하고 오스트리아(Austria)로 시선을 돌리게끔 만들었고, 결국 Villeneuve에게 영국을 견제하기 위하여 Cartagena에 있는 프랑스 함대와의 통합을 요청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영국이 이미 29척까지 증가된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이 요구에 커다란 부담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당시 넬슨제독은 프랑스의 함대를 견제하여 이집트로 향할 것이라 짐작했지만, 정작 그들은 영국 식민지를 유린하기 위하여 대서양을 항해 중이었다. 이를 알아차린 넬슨은 10척의 함대를 이끌고 그들을 추격했고, 임무에 실패한 프랑스함대는 유럽으로 회항해야만 했다.
20년 동안에 걸쳐 나폴레옹의 군대는 유럽을 장악해 갔고, 마침내 그가 마지막으로 시선을 돌린곳은 잉글랜드가 되었다. 그해 나폴레옹의 첫 번째 계획은 스페인과 힘을 합쳐 영국을 견제하기 위함이었고, 곧이어 그의 연합함대와 기병대를 바다에서 영국과의 교전에 대비해 집결 시켰다.
1805년 초, 프랑스의 함대는 영국의 서인도 제도의 식민지를 약탈하고, 무역을 방해하여 일단의 혼돈을 가져다 주려 했었지만 실패로 돌아가자 같은해 8월, 나폴레옹은 해군의 각 제독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들의 마음을 다졌다. "우리 연합함대들의 힘을 합친다면 잉글랜드는 곧 우리들의 것이다. 단지 24시간이면 모든 것이 끝날 것이며, 6세기 동안 영국에게 당했던 치욕과 원한을 갚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명령이었지만 대부분의 선장들은 불가능하리라는 것을 짐작했다. 프랑스 항구에 정박중인 나폴레옹의 함대는 모두 2,000여척, 그리고 90,000여명의 병력이 있었지만 막강한 영국의 해군력에 의해 거의 모든 항구가 봉쇄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의 메시지는 전함대가 카디즈(Cadiz) 80KM 동쪽 지점에 위치한 트라발카(Cape Trafalgar)곷으로 집결하라는 것이었다.
이 요구에 응한 스페인의 Franco-Spanish 함대 해군제독 Pierre de Villeneuve(1763-1806)는 2,640문의 총과 함포들로 무장한 33척의 스페인 함대를 이끌고 교전을 위해 카디즈에서 출항 했다. 하지만 Villeneuve의 함대는 애초부터 영국해군과의 교전으로 인해 치명적 손상을 입은 상태라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함대와는 비교가 되지 못했다.
곧, Villeneuve는 그의 함대를 유능한 해군제독 Rosily에게 인계하기 위해 스페인 반도 아래로 서둘러 향했지만, 트라발카 해전의 결과에는 영향을 주지 못했던 몇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의 함대 선장들은 이미 패전 분위기에 물들어 있었고, 오랜시간동안의 정박동안에 군기가 문란해졌으며, 부상자는 1,700여명에 달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프랑스의 제독명령 아래 스페인의 선장들은 임무를 원할하게 수행치 못했고, 선원들 대부분은 카디즈의 빈민가에서 강제 징용된 난민들이었기 때문에 배를 능숙히 항해 시키지 못한데다가 함포조차 다룰 수 없는 자들이었다.
영국 해군 역시 해안마을에서 강제 징병된 신참 수병들이었지만, 그들의 해군에는 바다에서 단련된 능숙한 선장들이 많았다. 이들로 인해 신참 수병들은 엄격한 규율과 고된 훈련속에 점차 강인해져 전쟁에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는 상태였다. 프랑스도 마찬가지로 노련한 항해사들이 많았지만, 혹독한 훈련을 받아 강인해진 영국의 해군을 맞이하여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10월 19일 Villeneuve는 전함대의 출항을 명했지만, 바람이 불지 않아 3척의 프리깃함과 7척의 전열함만이 항구를 벗어날 수 있었다. 다음날 모든함대가 남동쪽으로 이동을 시작하였고, 이를 알아차린 영국함대가 그들을 봉쇄하였다.
1805년 10월 20일, Franco-Spanish의 함대시야에 대기하고 있던 영국함대가 발견되었다. 함대수를 비롯하여 무기와 수병의 수에 있어 우세했던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이가 있었다. "우리는 역사속에서 가장 훌련한 해전을 기록할 것이다." 메시지가 영국해군 제독에게 전해진 기함 H.M.S. Victroy의 선상, 한쪽 팔과 한쪽눈, 검게 물든 금빛 끈에 소금에 얼룩져 마치 누더기같았던 코트를 걸친 자였다.
평온한 마음으로 차분하게 소식을 전해듣는 사람은 다름아닌 넬슨제독이었다. 그의 전술은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고, 그의 선장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의 계획을 확신했고 승리를 약속했다. 해전의 최대 관건은 평행하게 이동하는 두 개의 함대 사이에서 수많은 함포를 어떻게 포격하는가였다.
그는 명령을 하달했다. 적의 함대를 둘로 갈라놓은 후 한쪽의 함대를 선제공격하고 다른 한쪽이 지원오기 전에 선제 공격했던 함대를 괴멸시키는 것이었다. 함대가 평행하게 이동하며 발포한 후 즉각 직각으로 선회하여 적의 대열을 갈라 놓았고, 이러한 넬슨의 전술은 유래가 없었던 것으로 해전전술에 대변천을 가져왔다.
트라발카 곷 연안, 양측 모두 대열을 유지하며 접전은 다음날까지 시작되지 않았다. 넬슨은 선상에서 새로운 유니폼으로 갈아 입었고, 그의 가슴에 모든 메달과 새 리본들을 달았다.
전쟁신호가 울리자, 넬슨은 선장 Hardy와 Blackwood를 불러 적의 함대가운데로 돌진하라고 명령했고, 선미로 올라가(Quarterdeck) 항해장에게 메시지를 적은 깃발을 올리게 했다. "잉글랜드인들이여 그대들의 의무에 기대한다."
정오, 영국 Royal Sovereign의 함포에서 첫 번째 불이 뿜어져 나왔고, 이에 응사하려던 스페인의 3층갑판 전투함 Santa Anna에 대포알이 날아 들었다. 이 공격으로 인해 Santa Anna에 탑승하고 있던 400여명의 수병이 중상을 입거나 사망했다.
한편 넬슨의 다른 함대는 조용히 선회하며 프랑스 제독의 기함을 찾고 있었다. 그때였다, 거대한 배한척이 등장했고 그것은 다름아닌 130문의 함포를 탑제시킨 스페인의 4층갑판 전열함 Santissima Trinidad였다. 넬슨은 거기에 프랑스 제독이 승선했을 것이라 확신했다.
모두 8척의 호위를 받는 Villeneuve의 기함에, 즉각 발포명령이 떨어졌고, 이 공격으로 Santissima Trinidad의 수병 30명이 중상을 입고 50명이 사망했다. 하지만 Santissima Trinidad는 발포하지 않은채 그대로 지나쳐 갔고, 뒤이어 프랑스의 전투함 Redoubtable이 Victory호로 돌진해왔다. 2척의 배사이에 갈퀴가 던져지고 근접전으로 인해 양측에 불길이 치솟았다.
두척의 배가 붙어 접전이 벌어지고 얼마후 차츰 Victory호의 불길을 잡혀갔다.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던 그때 Redoubtable의 후미 갑판(Mizzen-top)의 머스캣(musket)저격수가 넬슨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곧이어 Victory호의 Quarterdeck에서 선장 Hardy에게 지시중이던 넬슨은 치명적 상처를 입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고, 즉각 Hardy선장과 2명의 하사관들에 의해 부축되었다.
한편, 이로인해 Victory호와 Redoubtable호의 상단 갑판에 쓰러져있던 40여명의 프랑스 중상자들이 모두 사살되었다. 데크 아래로 보내어진 넬슨 제독의 호흡은 조금씩 힘들어져 갔고, 넬슨제독의 명령을 받은 Hardy선장은 전투를 계속하여 14척의 적함을 더 나포 하였다.
오후 4시 30분, 승리의 소식을 전해들은 넬슨제독은 희미한 목소리로 "나는 20살의 약속을 지켰다. 나는 나의 의무를 다했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라는 말을 마친후, 그의 기함 Victory호에서 전사했다.
오후 5시, 14,000여명의 사상자를 낸 프랑스의 함대는 모두 괴멸되었고, 해군제독 Villeneuve는 영국해군에 의해 사로 잡혔다. 프랑스는 대부분의 함대를 잃었고 11척만이 카디즈로 무사히 회항했다.
넬슨제독을 승리로 이끈 그의 전술은 Victory호의 중앙돌파로 적함대를 둘로 갈라 놓은 후, 이어지는 함대를 평행상태에서 발포하고 90도 선회하여 적의 선열을 끊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혼란해진 적의 함대를 들이 닥쳐 승리로 이끄는 이 전술로 훗날 해군 전술에 많은 변화를 가져다 주게 되었다.
지혜로운 '청야 전술'로 수양제 30만 대군 대파
‘출렁이며 흐르는 저 푸른 살수에/수나라 백만 대군 장사 지냈지.//낚시꾼 나무꾼들 신나는 말이/그까짓 대국 놈들 별 것 아니로구나!’
조선을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운 조준이 청천강이 내려다보이는 누각에서 명나라 사신 축맹과 더불어 술을 마시며 지은 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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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용산의 전쟁기념관에 복원해 놓은 살수대첩 디오라마. |
이렇듯 을지문덕 장군이 수나라 대군을 물리친 살수대첩은 우리 역사에서 큰 자랑거리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조선 시대에서도 영양왕과 을지문덕 장군에게 제사를 지내며 자랑스런 조상을 잘 대접해 주었습니다. 오늘은 살수대첩이 일어난 과정을 알아 보고 고구려가 어떻게 수나라를 이길 수 있었는지를 살펴볼게요.
▲ 수나라 등장으로 고구려에 큰 위기 닥쳐
광개토태왕이 임금에 오른 후 고구려는 몽골 초원의 유목제국, 양자 강 이남의 한족 왕조, 황하 유역의 선비족 등이 세운 호족 왕조와 더불어 동아시아의 4대 강국으로 번영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200 년 동안이나 평화롭던 고구려에게 위기가 닥쳤습니다. 바로 581년 건국한 수나라의 등장이었습니다.
수나라의 문제는 양자 강과 황하 유역의 북제, 진 등을 통합해 강력하고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게다가 유목제국인 돌궐마저 굴복시켰습니다.
한 나라가 지나치게 강해지면, 주변의 나라들은 생존의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고구려도 마찬가지로 수나라로 인해 큰 위기 의식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수나라와 전쟁을 해야만 할 것이라면, 앉아서 기다릴 필요가 없겠지요. 고구려 영양왕은 598년 자신이 직접 말갈 군사 1만을 거느리고 수나라의 동쪽 전진 기지인 영주를 공격했습니다. 수나라는 즉시 30만 대군을 동원해서 고구려를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고구려군은 수나라 군대가 요하에 이르지 못하게 만드는 등 적을 물리쳤습니다.
마침내 598년 고구려와 수나라의 1차 전쟁은 고구려의 승리로 끝났고, 수나라의 문제는 더 이상 고구려와 전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수문제와 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수양제는 온 세상이 자신의 발 밑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야심가였습니다.
그는 대운하를 건설했으며 만리장성을 보수하는 등 백성들을 괴롭혔습니다.
▲ 수양제의 대군을 청야 전술로 크게 무찔러
그런 그에게도 한 가지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고구려였습니다.
마침내 수양제는 612년 무려 113만 3800 명의 대군을 동원해 고구려를 공격해 왔습니다. 아버지가 못 이긴 고구려를 이기겠다는 욕심, 고구려를 굴복시켜 천하의 지배자가 되겠다는 야망이 전쟁을 일으키게 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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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실총에 그려진 고구려 군대가 수나라 군을 공격하는 모습. 용맹스러움이 넘친다. |
이 때 수나라 정예병을 대적한 사람이 바로 을지문덕입니다. 그는 적의 군량이 부족해 상당히 지쳤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적과 싸우며 지는 척을 했습니다. 대신 수나라 군대가 가는 길에는 식량을 한 톨도 얻지 못하게 들판을 비워 두는 청야 전술을 폈습니다. 즉, 수나라 군대가 지나는 지방의 모든 시설과 양식을 불태우고 고구려인을 대피시켰던 것입니다.
수나라 군대는 고구려의 꾐에 빠진 줄 모르고 계속 깊숙이 진격해 왔습니다. 하지만 군량 보급이 안 되고 또 현지에서 식량도 얻지 못하자 수나라 군대는 고구려 수도 인근에 이르러 지치고 말았습니다.
그제서야 꾐에 빠짐을 안 수나라 군대가 후퇴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때를 놓치지 않고 을지문덕 장군은 총 공격을 명령했습니다. 고구려군은 도망가는 적들을 살수(지금의 청천강)에서 거의 전멸시켰습니다. 30만 5000 명 가운데 살아 돌아간 병사가 겨우 2700 명뿐이었습니다. 세계 전쟁사에서 이 같은 대승은 쉽게 찾아 보기 어렵습니다.
▲ 살수대첩은 고구려인 모두의 정신력 승리
살수대첩의 결과 수나라는 크게 패했습니다. 이후 613년과 614년에도 30만 명의 군사를 보내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역시 이기지 못했습니다.
수나라는 결국 고구려 공격의 실패로 인해 멸망의 길로 들어섭니다.
이처럼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은 우리 역사에서 길이 남을 큰 승리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살수대첩에서 쓴 청야 전술이 고구려 사람들이 서로 믿고 적을 돕지 않아야 승리할 수 있는 작전이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배신자가 생겨 수나라 군대가 식량을 구할 수 있었다면, 고구려는 결코 이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고구려가 수나라를 이긴 것은 을지문덕 장군만의 공이 아니라 적을 물리치겠다는 강한 정신력을 지닌 고구려인 전체의 승리였던 것입니다.
/김용만(고구려역사문화연구소장)
(소년한국일보)
http://kids.hankooki.com/lpage/study/200411/kd2004112515243145730.htm
정부는 해도원사 나세와 심덕부, 그리고 최무선을 진포로 파견하여 전함 1백 척을 거느리고 왜구를 진압하게 하였다. 이 때 최무선은 자신이 만든 화포를 처음으로 사용하여 왜구의 배들을 불태워 싸움을 승리로 이끄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초석(硝石)과 유황(硫黃), 그리고 목탄(木炭)을 혼합한 근대적인 폭발화약의 제조법은 이미 북송대부터 알려지기 시작하여 원대에 이르러서는 일본의 정벌 때에도 사용할 만큼 보편화되었다.
그러나 중국은 고려에 대해서는 이를 군사기밀이라 하여 철저하게 비밀로 하였다. 왜구를 격멸하기 위해서 화약의 제조가 절실하다고 생각한 최무선은 중국의 강남에서 온 상객 가운데 화약의 제조법을 터득한 사람을 자신의 집에 데려다 두고 의식을 제공하며 수십일 간에 걸쳐 화약 제조의 요령을 터득하였다. 그리하여 우왕 3년에 직접 조정에 건의하여 화통도감(火通都監)을 설치하게 하고, 여기에서 화약을 제조하면서 각종 화기를 제작하였다.이 당시 그가 만든 화기로는, 대장군(大將軍)·이장군(二將軍)·삼장군(三將軍)·육화석포(六花石砲)·화포(火砲)·신포(信砲)·화통(火通)·화전(火箭)·철령전(鐵翎箭)·피령전(皮翎箭)·질려포 ·철탄자(鐵彈子)·천산오룡전(穿山五龍箭)·유화(流火)·주화(走火)·촉천화(觸天火) 등이 있었다. 이렇게 제작된 화기들은 진포 해전에서 사용되어 왜구를 격멸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고려말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예문관 대제학을 지낸 정이오(鄭以吾)가 그의 저서 {화약고기(火藥庫記)}에서 우왕대의 진포해전과 남해의 전투에서 우리 군사가 왜구를 격파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화통(火通)과 화포(火砲)를 이용하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한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싸움에서 화포를 맞은 왜선(倭船)은 거의 모두 불에 타서 연기가 온통 하늘을 뒤덮었으며, 불에 타죽거나 물에 빠져 죽은 왜구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이처럼 진포의 해전은 우리측의 승리로 끝났지만, 해안에 정박하여 있다가 우리 전함의 화포로 거의 모든 배를 잃은 왜적들은 사실상 퇴로를 차단 당한 형편이 되었기 때문에 육지 깊숙한 곳으로 달아나면서 닥치는 대로 잔악한 행위를 벌였다. {고려사}의 기록에 따르면 이 때 왜구들은 포로로 잡은 우리측의 양민과 어린아이들을 대거 살륙하여 시체가 산처럼 쌓였으며, 여기에서 살아서 도망쳐 나온 사람은 겨우 330여명에 지나지 않았다. 왜구들은 심지어 2-3세 된 어린아이의 머리를 깎고 배를 갈라 쌀과 술과 함께 제물로 삼아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왜구들이 저지른 살인과 약탈은 바다에 인접하여 있는 삼도의 마을들을 폐허로 만들 정도로 잔인하고 처참한 것이었다. 왜적의 일부는 옥천과 영동 쪽으로 달아나 약탈 행위를 벌였는가 하면, 일부는 상주와 선산, 금산 쪽으로 달아났다. 특히 상주 쪽으로 달아난 왜군의 주력 부대는 다시 서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경산(星州)을 거쳐 함양의 동쪽에 있는 사구내역에 주둔하였다. 정부는 원수 박수경, 배언 등을 파견하여 이들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오히려 싸움에서 져 박수경과 배언을 비롯하여 아군 5백여명이 전사하였다. 승전에 고무된 왜구들은 함양을 노략질하고 다음 달인 9월에는 남원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로 끝났다. 이들은 운봉현으로 물러나 인월역에서 두둔하면서 "장차 말을 금성(潭陽)에서 먹여 가지고 북상하겠다"고 기세를 부렸다.
이에 정부는 이성계를 양광전라경상도도순찰사로, 변안열을 체찰사로 각각 임명하고, 왜구들에 대한 본격적인 토벌에 나섰다. 이들 지휘부는 병력을 거느리고 남원으로 달려 가 그곳에 있던 배극렴 등과 합류하여 운봉을 지나 황산의 서북쪽에서 왜구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마침내 그들을 섬멸하였다. 황산전투는 숫적으로 10배에 가까운 적들을 대상으로 하여 이들을 거의 전멸하고, 불과 70여명의 적들만이 살아남아 지리산 속으로 도망갈 정도로 완전한 승리였다.이 때의 전투가 얼마나 치열한 것이었는가는 당시 그곳 냇가에서 흐르는 물이 모두 붉게 물들어 일주일이 지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기록에서도 알 수 있다. 이 싸움을 계기로 하여 왜구의 세력은 차츰 시들어갔으며, 한편 이성계 등 신흥 군부세력은 확고한 세력 기반을 구축하게 되어 뒷날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왕조를 건국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진포해전은 이제까지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우리 나라에서는 처음으로 화기를 제조하여 이를 왜구의 토벌에 이용함으로써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에서 전사상戰史上 큰 의의가 있었으며, 또한 이 싸움에서의 승리를 계기로 하여 왜구의 침입이 수그러지기 시작하였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전투였다.
그러나 그 뒤에도 이곳 진포 지역에 대한 크고 작은 왜구의 침입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진포해전이 있고 난 뒤 2년
째가 되는 우왕 8년 10월 왜선 50척이 진포에 침입하자, 해도원사 정지가 이를 공격하여 군산도(지금의 고군산)까지 추격한 끝에 4척을 포획하였으며, 우왕 14년 5월에는 다시 왜선 80척이 대거 진포에 들어와 근처의 마을들을 노략질하였다. 정부는 상호군 진여선를 전라양광도에 파견하였으나, 그가 병을 핑계로 가지 않자, 그의 자제와 노예들 중에서 대신 갈 수 있는 사람들을 모두 징발하여 보내 왜구를 막게 하였으며, 이를 피한 자들은 군법으로 엄단하고 재산을 몰수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왜구들은 전주에 침입하여 관청을 불살랐는가 하면, 김제와 만경, 인의현 등에도 침입하였다. 이같은 왜구의 잦은 노략질은 공양왕대를 지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야 마침내 소멸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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